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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鄕을 追憶하며

이제는 전설로 남은 나의 고향

1994년 광주광역시 서구 치평동에 있던 상무대(보병, 포병, 공병, 전차병, 화생방병 등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가 우리 고향인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와 대도리의 관동부락, 그리고 삼계면의 일부를 수용하여 이전해 오게 됨에 따라 대를 이어 여기 살던 사람들은  국가시책에 희생되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상무대실향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추석 명절이 오면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은 고향의 부모 형제를 찾아뵙고, 또 조상들의 산소에 성묘하는 것이 우리 고유의 아름다운 전통이며 정 깊은 관습일진대,  이런 특수한 사정 때문에 고향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상무대실향민(?)들은 가고 싶을 때 마음대로 고향을 찾아갈 수가 없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 되어버렸었다. 

 

2023년 이렇게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33년 만에 추석을 맞으면서 단체로 고향방문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실향민을 대표해서 애향심 넘치는 몇 사람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진 성과인 것이다. 고향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옛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이 변해버린 그야말로 상전벽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가 되었을지라도, 고향을 잃은 사람들은 옛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곳 상무대가 내 고향이었다는 애틋한 마음으로 언제라도 한 번쯤은 가보고 싶었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국 각처로 흩어져 살던 고향사람들이 금년에는 함께 모여 단체로 고향방문을 하게 되었으니 그 감회가 어땠을까? 필자는 개인 사정 때문에 이 '단체고향방문단'에 함께 참여하지는 못 했지만, 그 감회만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오랫동안 서로 멀리 떨어져 살면서 보고 싶어 하던 사람들이 함께 만나서 고향방문을 마친 후, 서로 간의 안부를 묻고 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인터넷 친목 연락망인 '고향 알림 마당'에 올릴 우리들의 고향 원촌부락에 대한 유래와 역사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과문한 필자로서는 마음에 여간 부담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죽마고우의 권유를 거절하는 것도 미안한 일이어서 부족한 대로 여기 원촌의 역사와 유래를 옛 어른들에게서 들었던 것들과, 또 여러 자료를 통해 얻은 토막지식으로 부족한 대로 간단히 올린다.

 

현재 상무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삼서면 학성리는 필자가 어린 시절부터 청소년 시절까지 살았던 마을인 원촌 부락을 포함해서 내봉, 외봉(학동), 자동, 회성 등 5 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원촌부락은 후동, 뒷동, 대전, 신대 그리고 원촌(서원대) 마을로, 학성리 전체 자연부락 중에서 가구수와 인구가 제일 많은 자연부락이었다. 그런데 후동과 뒷동은 뒤에 있는 마을이라는 같은 뜻을 갖고 있지만, 아마도 마을이 붙어 있지 않고 조금 떨어져 있어서 같은 뜻의 이름을 따로 다르게 불렀던 것으로 추측한다.

 

이제 원촌부락의 역사와 유래를 대강 살펴보면, 사람들이 이곳에 살기 시작한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으리라는 여러 기록들이 있다. 즉 원촌(書院臺)에 있던 장천사(長川祠)의 유래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울에 살던 심우신(沈友信1544~1593)이라는 무관이 가솔을 이끌고 배를 이용하여 처가가 있는 영광군 외서면 유평리 부귀동마을로 내려와서 지금의 원촌마을인 영광군 외서면 장천리에서 의병 수천 명을 모집하여 훈련을 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니 이곳 원촌에는 그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었으므로 영광군 외서면 장천리라는 행정단위가 당시에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대한민국 육군의 간성들을 교육하는 상무대가 그 자리에 터를 잡게 된 것이 이미 400여 년 전에 수천 명의 충성스러운 우리 선조들이 목숨을 바쳐 침략 일본군을 막아내겠다고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던 것과 우연한 인연은 아닌 듯싶다. 

 

당시 심우신 의병장의 처가는 영광에서 만석을 거둬들이는 대단한 갑부였기에 그 처가의 경제적인 도움으로 수천 명의 의병을 훈련시키며 먹이고 재울 수 있는 시설 또한 가능했다고 한다. 다시 간추려 보면 우리 고향은 1592년 이전부터 영광군 외서면 장천리로 존재하고 있었고, 1914년에 영광군 외서면 전체가 장성군 삼서면으로 편입되면서 학성리 원촌부락이 되었으리라 생각할 수 있겠다. 또 원촌마을 일부를 서원대(書院臺)라고 불렀던 것에서 서원(書院)이 있던 마을에서 원촌(院村)이라는 이름으로 변하였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 고향 마을 원촌부락과 이런 깊은 인연이 있는 의병장 심우신(沈友信)과 장천사(長川祠)에 대하여 살펴보자. 그는 청송 심씨로 영의정 심회(沈澮1418~1493)의 5대손이며, 심회는 조선 개국공신 심덕부(1328~1401)의 손자이고, 부친은 세종대왕의 장인이었던 심온(1375~1418)이다. 또 심우신의 6촌 형이 서인의 영수였던 심의겸(1535~1587)이었으니 그야말로 권문세가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양반가의 선비들이 선호하던 문과에 급제하는 것보다 무술을 좋아하여 1567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무장으로 여러 관직을 거쳤지만, 상관의 부정에 항의하고는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왔을 때, 왜란이 일어나 가솔들과 처가가 있는 영광으로 내려와 의병을 모집하여 한 달간 훈련시킨 후 ‘표의(彪義)’의 기치를 높이 들고 출정하여 충북 영동과 수원성에서 큰 전공을 세웠고, 진주성이 위험하자 김천일(1637~1593)과 함께 진주성으로 달려가 10만 왜군과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장군의 시신을 찾지 못하여 진주성 함락일을 제삿날로 정하여 장천리에 초혼장으로 모셨다. (묘소와 제각(祭閣)이 외봉 마을에서 내봉 마을로 넘어가는 산자락에 있었는데, 필자가 소년시절에 그곳에 가서 놀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후 1713년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그가 수천 명의 의병을 모아 훈련시켰던 영광군 외서면 장천리에 장천사(長川祠)를 세워 배향하게 되었다.

 

그 후 장천사(長川祠)에는 1726년 전라도 관찰사로 선정을 베풀었던 충민공 쌍호당  이단석 (忠愍公 雙壺堂 李端錫1625~1688)을 합사 하였고, 1727년에는 영광군수로 역시 선정을 베풀며 특히 교육에 크게 이바지했던 쌍호당의 부친인 취수헌 이제형(醉睡軒 李齊衡) 선생을 추가 배향하게 되었으나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장천사(長川祠) 역시 폐철되었으나, 1903년 관찰사 이근호가 글을 써서 [모충경현비( 慕忠景賢碑)]를 건립하고 단을 세워 제사하였다. 1973년 장천사(長川祠)의 복원을 추진하였으나 여의치 않다가 1989년 공사를 착공하였으나 상무대 부지로 결정되어 사우(祠宇)를 청송 심 씨들이 많이 살고 있는 장성군 삼서면 유평리 부귀동 마을에 복원하게 되었고 사우도 장천사에서 표의사(彪義祠)로 이름이 바꾸었다.